월간 현계양계의 태동
월간 현대양계는 1969년 창간 제1호를 발행, 40년간 우리나라 양계산업과 애환을 함께하며 한국양계의 파노라마를 지켜온 양계전문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대양계의 제호(題號)의저자는 김기승 선생이며, 창간 표지는 난좌에 담겨진 계란이었다.
김길원 발행인은 창간사에서 「정부나 당국에게 축산 및 양계산업의 진흥을 위한 시책과 양계인의 목소리를 건의, 전달하겠다」고 밝히고 과학적인 양계경영관리에 대한 지식전달과 양계산업 발전의 지침서로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천명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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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양계 창간호 |
꺼지지 않은 불씨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한 양계는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농가부업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일정치하시 그래도 규모가 컸다는 양계장은 대도시 근교에서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던 것이 고작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극도의 사회적 혼란과 정국불안은 닭을 포함한 모든 가축을 급속하게 격감시켜 축산자체가 일대위기를 맞았다.
6.25 사변으로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에 처하게 됐고 양계라는 단어조차 망각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민족적 비극을 맞이하면서 전화가 쓸고 간 50년대의 양계는 농가의 마당닭 정도에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1958년에야 우리나라 양계업은 1천만수를 넘기 시작했다. 이후 미미한 답보상태가 지속되다가 1966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해 66년에 1천4백만수, 67년 1천7백만수를 돌파하는 기록을 갱신하기에 이르렀고, 한국양계의 금자탑을 세운 현대양계가 창간된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당시 양계상황은 100수 이하가 57% 정도였고 1백수 이상을 대규모로 불렀는데 15%를 차지했다.
돌이켜보면 사육수수가 1백수가 넘어도 대규모로 지칭됐으니 오늘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사육수수가 늘어난 것은 농촌의 소규모 방사형태에서 부업이나 전업형태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그 궤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개구리양계, 미꾸라지양계
50년대 양계는 일제시대 때 장려한 백색레그혼종, 나고야종, 로드아일랜드종, 프리머스록종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이중에서도 백색레그혼종과 나고야종이 일반적으로 사육돼왔다.
사료도 열악해 만주에서 수입한 옥수수, 수수, 대두박이나 밀기울 등에 생선대가리, 음식찌꺼기 등을 삶아서 사료와 섞어 먹였고 농촌에서는 개구리나 미꾸라지를 잡아 버무려 먹이는 자가사료 시대로 개구리양계나 미꾸라지양계 같은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계사형태는 평면계사로 한사람이 3백~5백수 정도를 관리할 수 있었고 닭의 개량은 6.25동란 이후 종란 20만개가 외국원조기관의 지원으로 종계수수 확보에 근간이 되기도 했다. 60년대 한국양계는 각종 양계단체발족의 태동기였다. 부화협회, 가금연구회, 양계기술 강습회, 한국가금협회 등이 발족되는 우리나라 양계산업의 기반조성기로 요약된다. 이 같은 토대위에 현대양계가 창간된 1969년은 제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한 배경을 바탕으로 양계산물의 수요가 급속하게 늘어나게 됐고 이는 눈부신 양계산업 발전의 청신호로 그 근간을 이뤄 오늘에 이르게된 것이다.
채란계와 육용계 수입이 봇물을 이루기 시작했고 종계장과 부화장은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러나 어떤 종계들은 능력검정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양계농가에 막대한 피해를 안기기도 했다. 70년대를 전후해 양계산업은 농가부업이나 겸업형태를 벗어나 전업화나 기업화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평사에서 케이지사육으로
종래의 평사사육에서 케이지사육으로의 전환은 양계산업에 획기적으로 일대전환기를 안겨주었다. 케이지사육은 평사사육보다 같은 면적에서 대량사육과 관리용이, 위생적인 관리 등 그 장점이 뛰어나 한국 양계는 전업화와 기업화를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육계산업도 계절적인 수요에 국한됐던 과거의 소비패턴에서 탈피해 사계절 소비확대로 확산됐고 특히 전국적인 「통닭센터」의 등장은 닭고기산업에 도화선으로 경제성장과 더불어 상승세를 타고 전국적으로 열기를 더해갔다. 정부는 축산업 발전을 위해 1969년 소득세법을 개정, 1970년부터 7년간 완전면세, 1976년 이후 3년간은 반액절감 등 면세조치로 우리나라 축산업발전에 가속페달을 안긴 것이다.
현대양계는 「새시대 양계가의 알찬 길잡이」를 모토로 꾸며졌고 표지모델에 유명 영화배우를 게재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당시 유명 여배우들의 표지모델은 지금과 달리 은막의 주인공들이었기에 사진조차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파격적인 인기도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사양관리기술과 새로운 지식 및 업계정보는 양계인들의 필독서로 현대양계를 손꼽아 기다리는 잡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극심한 불황
현대양계가 창간 이후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 양계업계는 유래없는 불황을 맞아 악전고투하게 된다. 1973년부터 세계적인 유류파동과 원자재가격 상승은 수입사료에 의존하던 국내 사료가격을 두배로 뛰게 했고 양계산물의 과잉생산이라는 이중고를 겪어야했다.
생산과잉 요인은 외국계의 무질서적인 도입과 과잉생산, 사료가격인상으로 1968년, 1971년, 1973년 세 차례의 불황으로 수많은 양계농가가 도산의 아픔을 겪어야했다. 특히 1973년 유류파동은 결정타였고 이후 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생산조절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했고 한국경제가 회복하면서 양계산물의 수요는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 한국양계산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난가제도 창안으로 계란유통구조에 기여
현대양계는 1973년부터 지금까지 시세속보로 생산자와 유통인들 간의 상호조절기능을 담당, 고질적인 계란유통구조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왔다.
당시 계란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남대문시장 가격과 동대문시장 가격이 그랬고 전국적으로 계란가격 자체가 기준가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계란가격은 엿장수 마음대로처럼 들쑥날쑥이었고 생산농민들도 얼마에 거래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생산농가는 유통인이 계란을 유통시킨 이후에 다시말해 후장끼로 가격을 알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시세속보는 이같은 난제를 해결해준 묘책 중의 묘책으로 매일매일 전화로 시장가격을 수집, 일정한 가격을 고시함으로써 우리나라 난가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것이다.
생산자와 유통인 모두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상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우여곡절도 겪지 않을리 없었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혀있는 민감한 사안이어서 자칫하면 충돌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상대의 의견이나 생산, 시장 상황에 따라 수시로 민감하게 변하는 시세인지라 마찰음이 다반사로 일어나기도 했지만 현대양계의 시세속보는 과히 우리나라 계란유통구조에 획을 긋는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자동화의 열기
80년대를 지나면서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양계업계는 두 가지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수입개방에 따른 국제경쟁력 향상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자동화시스템 도입이라는 새바람이 바로 그것이다. 수입개방이라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생산비절감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인력난에 대처하고 생산성향성으로 국제경쟁력을 갖춰야한다는 숨막히는 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선도적인 양계인들이 자동화시스템을 추구했고 완전자동화가 도입되기 시작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도 겪어야했다. 완전자동화 무창계사 직립식케이지 설치농장에서 수천수만 마리의 산란 계사들이 집단 폐사한 것은 뼈아픈 교훈을 던져주었고 자동화시스템이 안착되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치고는 그 대가가 너무나 컸던 것이다.
90년대는 수입개방의 위기감속에 시설업체들이 약진하는 시대였고 오늘날의 대규모 농장화를 추구케한 밑거름이다. 특히 육계산업에서는 계열화가 도입되는 시기로 국내 육계산업에 금자탑을 쌓은 것이 계열화이다. 가슴아프게 선도업체가 계열화 사업추진으로 파산되기도 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도 겪어왔지만 과거 국내 육계산업을 뒤돌아보면 한탕주의식이었고 야반도주가 비일비재했던 것이 육계산업의 현실이었다.
육계가격이 삼복성수기에 맞춰져 있던 시절에는 생산조절이 이뤄질 수 없었기에 잘하면 한해여름에 거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업이 육계업이었고 잘못되면 밀린 사료값에 병아리값에 야밤에 비닐하우스에서 줄행랑을 치던 것이 바로 계열화사업 정착 전의 우리나라 육계산업의 야누스상이었다.
육계 계열화사업은 생산뿐만 아니라 가공, 유통 등 전 분야에 걸쳐 일괄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어 생산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축산박람회의 밀알이 되다
현대양계는 「제1회 닭의 날」을 제정, 닭 모형 전시, 양계시설전시, 투계대회, 닭품종 전시 등 닭을 주제로 하는 닭의 날을 제정하고 전시행사를 펼침으로서 소비자들에게 다가서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이 닭의 날은 대한양계협회가 주관한 한국양계박람회의 모태가 되었고 양계박람회는 한국축산박람회로 그 위용을 갖추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돌이켜보면 작은 아이디어와 열정이 합쳐진 닭의 날 제정이 오늘날의 한국축산박람회로 자리를 잡게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전문지 기자의 산실, 현대양계
축산관련 신문들이 창간붐을 이루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 현대양계는 국내 축산관련 신문기자들의 훈련소라는 별칭을 얻기에 이른다. 신입 기자들을 2년 정도 훈련시켜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할 무렵이면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고 결국에는 잡지기자에서 신문기자로 탈바꿈돼 버렸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기자가 빠져버린 사무실은 낭패감과 허탈감에 사로잡히지만 보다 큰 세상을 향하는 젊은 기자들을 붙잡아서도 안 되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대우는 그들을 잡아둘만한 요인이 충분할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기자들을 배출시킨 현대양계는 그래도 축산관련 신문 등지에서 축산발전이라는 사명감아래 맹활약하고 있는 이들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있다.
현대양계에서 뿐만 아니라 월간 현대양돈도 그렇고 현대양식이라는 잡지까지 매월 세 가지 월간지를 만들던 당시로서는 수많은 기자들을 배출시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기라성 같은 필진들
지난 40년간 현대양계에는 기라성 같은 필진들이 정말 소중하고 소중한 옥고들을 기고했고 우리 양계인들의 양식이 되어 한국 양계산업의 금자탑을 세웠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정책, 육종, 사양관리, 질병, 계사시스템, 사료, 영양, 환경, 유통, 가공, 경영, 부화, 육추, 위생, 주요통계, 외국의 양계, 연구실적 등 어느 한 부분도 빠짐없이 기라성 같은 필진들이 옥고를 보내주었고 좌담회, 인터뷰 등을 통해 우리나라 양계산업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케하는 밑거름이 되어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40년이면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다는데 지금까지 단 한호의 결호도 없이 오늘의 현대양계가 있기까지는 국내외 정상의 현대양계 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함을 드리는 바이다. 특히 현대양계의 편집방향에 고견을 아끼지 않는 편집위원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지난 40년간 현대양계에서 열과 성을 다해 좋은 잡지를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선배님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2000년대는 계산물의 위생조건 강화시대
2000년대로 접어들어 축산물은 물론이고 계산물의 위생조건이 화두가 되었고 계란과 닭고기의 위생과 품질이 가장 큰 이유로 등장했다. 사료, 동물약품, 도계, 가공, 유통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위생적이고 안전한 계산물 생산이 사회적인 문제이고 국민적인 여망이었다.
따라서 안전하고 위생적이며 품질 좋은 계산물 생산과 유통만이 우리나라 양계산업의 흥망을 좌우하는 시대인 것이다. 소비자들인 국민들이 외면하는 계산물은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없기에 양계인 모두는 소비자들의 기호와 그들의 선택에 따라 민감하면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